저작권 : 제 C-2014-029510호 및 제 C-2015-018493호

 

  

                           

 

                                                                                     

                                                                                                                             奈乙  김 성혁   

 

   일부 지명학자들은 한반도 어느 곳이던,「지도」를 본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삼국의 옛 지명(地名)을 논하고 있고, 일제 억압에서 벗어난 70년간을 대학생들에게 국어학을 교수하고 있다.「지도」와「지형」을 모르고 어떻게 「삼국의 지명」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으니, 「삼국의 지명」이, 현재 「어느 곳」인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어학적인 유희(遊戱)」일 뿐, 진실이 아닌 것이다. 지명학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저명한 언어학자일 뿐이지, 지명학자는 아닌 것이다. 한반도「지도」와「지형」을 모르는 자는 지명학자를 자처할 자격이 없다. 언어학자들은 지명학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풀어 놓아라! 지명학은 언어학자의 전리품이 아니고, 독자적인 학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 삼국시대 지명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중이다.

 

 

  ※ 군현(郡縣)의 지형 중에는 「새」라는 지명어가 상당히 여럿 눈에 띈다. 그런데 이 「새」라는 지명어를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새」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네가지 종류가 있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보자.

 

   ㉠ 새 : 새 鳥(조) → 신라 沙伐(사벌) : 새, 백제 沙村(사촌) ; , 백제 新村(신촌) ;

                                   고구려 금뇌(金惱) ; 새골 chapter 1의 6) 고구려 금뇌 참조

   ㉡ 새 : 새 東(동) → 경주시 일대 ; 斯羅(사라), 新羅(신라), 金城(금성) → 새

   ㉢ 새 : 새 新(신) → 부여읍 일대 ; 所夫里(소부리), 泗沘(사비) → 새부리 → 新京(신경)

   ㉣ 새 : 새 初(초) → 합천군 초계면 일대. 초팔혜(草八兮) → 사팔혜(沙八兮)

 

 

   41)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일대 : 신라 음리화현(音里火縣) → 수리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일대는 벙성천과 청하천이 만나서 날렵한 새의 상반부 모습을 만들었는데, 이 「그림」을 관측한 신라인은 「음리화현(音里火縣) → 수리벌」이라 작명하였다. 신라의 지명에 「수리」의 지명이 여럿이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수주(水酒)」「솔이(率已)」「음리(音里)」등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청리면 일대를 석리화현(昔里火縣)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음리화현(音里火縣)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종실록 지리지는 조선 태조 2년에 복간한 판본을 근거로 편찬한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늦게 복간한 현존하는 삼국사기 지리지가 잘못된 것이다.

 

   ㉠ 音 : 소리 음 → 훈음차 ; 소리 → 수리 {소리와 수리가 음이 비슷하다.}

        里 : 리 → 음차 ; 리 {음조율로 쓰었다. 수리라는 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중복시켰다.}

        火 : 불 화 → 훈음차 ;

        ∴ 音里火 : 수리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일대 :

신라 음리화현(音里火縣) → 수리

새 鳥(조)자  갑골문과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물수리 그림

 

 

   42)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읍 일대 : 진한 소국 사벌국(沙伐國) → 새(鳥)나라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읍 일대를 감돌아 흐르는 두 물인, 북천과 병성천이 만든 지형은,  뽀족한 부리가 있는, 「」의 머리 부분 형상이다. 이 「그림」을 본 진한 소국 사벌국(沙伐國) 사람들은,「새나라」라고 나라 이름을 작명하였다.

 

   沙 : 사 → 음차 ; 사 → 새 {'사'와 '새'가 음이 비슷하다.}

   伐 : 벌 → 음차 ; 벌 →

   沙伐國 : 새나라 :현대어 : 새벌나라}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읍 일대 :

진한 소국 사벌국(沙伐國) → 새(鳥)벌나라

옛날에는 길조였던 까치 캐릭터와

새 鳥(조)자  갑골문

 

   43) 충청남도 아산시 일대 : 백제 아술현(牙述縣) → 네수리골

 

   충청남도 아산시 일대는 금곡천과 온양천이 만나서 만든 새모양의 「그림」이 '넷'이 있다. 아산시 좌부동에 한 마리, 송악면 사무소에 한 마리, 외암리 일대에 한 마리, 수철리에 한 마리 등 모두 네 마리의 「새 그림」이 보인다. 이 그림을 본 백제인은 「아술현(牙述縣) → 네수리골」이라 작명하였다.

 

   牙 : 엄니 아 → 훈음차 ; 니 → 네(四) {'니'와 '네'가 음이 비슷하다.}

   述 : 술 → 음차 ; 술 → 수리

        {신라가 개칭한 음봉현(陰峯縣)과의 대응 관계로, 述은 「수리」임이 밝혀 졌다.}

   牙述縣 : 네수리골

       {지명학자들은 」이 「수리」인 것은 밝혀 냈지만, 「」가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대응 관계는 「지형과의 대응 관계」인데, 지형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니, 그들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 숫자(사)」가 백제어로 「네(넷)」임을 나타내는 멋진 증거인데, 「牙述(아술)」이 「수리」인 것을 알아내는 것으로 그친 것이, 긴 아쉬움으로 남는다. 숫자(사)」는 백제어로 「네」또는 「넷」이다. 지명학자의 충분하지 못한 연구가, 삼국의 언어를 탐구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일대 :

백제 아술현(牙述縣) → 네수리골

네 마리 수리의 비상

 

   44)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일운 사비(泗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일대는 AD538년(성왕 16년)에 공주 웅진성에서 천도한 신경(新京)이라는 사실을 지명학자들은 까맣게 잊고 있다. 그들은 소부리군(所夫里郡)과 일운 사비(泗沘)와의 대응 관계로 일단 신라의 「새벌」과 같은 뜻임을 밝혀 냈다. 그런 까닭으로 일부 학자들은 소부리(所夫里)를 서벌(徐伐)과 같은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 경주시가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새벌{동경(東京)」이라고 한 것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부여는 한반도 서쪽에 있다.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일운 사비(泗沘)가  신라어로「새벌」인 것은 틀림 없다. 문제는 「새」라는 단어에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많은 것을 국어학자가 잊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지명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네 가지」 경우가 있다.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일운 사비(泗沘)가  신라어로「새벌」이라는 것은 「새{신(新)}부리 즉 신경(新京)」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빚어진 일이다. 부여 천도는 AD538년(성왕 16년)에 이루어 졌고, 사비(泗沘)는 「새(新)부리」로 「신경(新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모든 지명학자들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신라의 「새{동경(東京)}」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일대 :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 새부리{신경(新京)}

부여 관북리 신경(新京) 유적지

백제 사비(泗)는 부리」로 신경(新京)이다.

 

새 新(신)자 갑골문

 

서울 京(경)자 갑골문

 

 

  45)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 : 신라 서울 → {동경(東京)}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는 신라의 수도로 현대어 「서울」의 어원을 만들어낸 산실이다. 서울이란 경주시가 한반도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라 했고, ''이 「수도」로 굳어지면서 의미가 「동경(東京)」이라는 뜻으로 변한 것이다. 진한 소국 시절의「」은 「금성(金城)」「사라(斯羅」「신라(新羅)」로 국호가 변해 왔지만, 모두 「」의 음차, 훈음차에 지나지 않는다.

 

   ㉠ 金 : 쇠 금 → 훈음차 ; 쇠 → 새 {쇠와 새가 음이 비슷하다.}

        城 : 벌 성 → 훈차 ;  {추화(推火)를 밀성(密城)으로 개칭했으므로, 「불 火(화) = 城(성)」이다.}

        ∴ 金城 : {東京(동경)}

   ㉡ 斯 : 사 → 음차 ; 사 → 새 {사와 새가 음이 비슷하다. '사'는 '새'의 음차로 가장 많이 사용했다.}

        羅 : 벌 라 → 훈음차 ; 벌 →

        ∴ 斯羅 : {東京(동경)}

 

   ㉢ 新 : 새 신 → 훈음차 ; 새 {새 東(동)}

        羅 : 벌 라 → 훈음차 ; 벌 →

        ∴ 新羅 : {東京(동경)}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 :

금성, 사라, 신라 →   {東京(동경)}

동해안 일출과

새 東」자 갑골문

 

 

   46)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 일대 : 백제 사촌현(沙村縣) → {현대어 : 새(鳥)마을}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일대는 아산만과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냇물이 만든 지형이 멋진「새의 부리와 머리」를 만들었다. 이 「그림」을 관측한 백제인은, 「사촌현(沙村縣) {현대어 : 새(鳥)마을}」이라 작명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도로를 삭제 하였다.)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 일대 :

백제 사촌현(沙村縣) {현대어 : 새마을}

새 캐릭터와

새 鳥(조)자 갑골문

 

 

    47) 경남 합천군 초계면 일대 : 가야 사팔혜국(沙八兮國) → 신라 초팔혜현(草八兮縣) ; 플팔헤골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일대는 긴 곳은 직경이 10km를 넘도, 짧은 곳은 8km 정도가 되는 산중 분지 평야다. 삼한시대 이곳은 개간된 곳은 밭으로, 개간되지 못한 곳은 풀밭으로, 여름철에는 사방이 온통 푸른 지대였던 곳으로 추론한다. 이러한 상황을 국호로 남긴 것이 가야 사팔혜국(沙八兮國)인데, 우륵의 12가라도에 나온다. 가야 제국이 신라에 멸망한 후, 신라는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 이름했다.

 

   沙 : 사 → 음차 ; 새 {「새는 '풀'이라는 뜻도 있다. 그 예로는 '억새'가 있다.」

       八兮 : 팔혜→ 음차 ; 팔헤 {'파레' 또는 '팔헤'의 음차이다. 현대어로 '파랗다'는 의미이다.}

       沙八兮國 : 새파레나라 {현대어 : 새파란 나라 또는 풀파란 나라}

 

   ㉡ 草 : 플 쵸 → 훈차 ; 플

       八兮: 팔혜 → 음차 ; 팔헤 {위와 같다.}

       ∴ 草八兮縣 : 플파레골 {현대어 풀파란 골}

 

   ㉢ 草 : 플 쵸 → 훈차 ; 플

       谿 : ⓛ 시내 계 ② 다툴 혜.

       ∴ 草谿縣 : 플내골 또는 푸르헤골.

       {속뜻 : 푸르헤 → 谿(계, 혜)로 음이 둘인 것을 이용하여, 초팔현의 본래 의미를 표현하였다.}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일대 :

가야 사팔혜국(沙八兮國) :

신라 초팔혜현(草八兮縣) ; 플팔헤골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일대 :

대부분 밭으로 이루어진 직경 10여 km나 되는  분지 평야이다. 개간된 곳은 푸른 밭으로, 개간되지 못한 곳은 푸른 풀밭으로 인하여 탄생한 지명이다.

풀 草(초)자 전서(篆書)

 

   48)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 일대 : 고구려 마경이(麻耕伊)  → 삼받갈이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 일대는 두 줄기의 냇물이 일직선으로 비스듬하게 흘러 과일읍 부근에서 합쳐지게 되는데, 이 두 물이 만든 지형이 「쟁기 날 모양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지형을 관측한 고구려인은 「마경이(麻耕伊)  → 삼받갈이」라 작명하였다. 현대의 쟁기의 한가지 용도를 한자를 빌어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어가 신라어와 매우 닮았다는 증거가「마경이(麻耕伊)」이다.

 

    麻 : 삼 마 → 훈차 ; 삼

    耕 : 받갈 경 → 훈차 ; 받갈

    伊 : 이 → 음차 ; 이

    麻耕伊 : 삼받갈이 {쟁기의 용도를 풀어서 지명의로 사용하였다.}

 

     고구려어에 삼, 밭, 갈다. 삼밭갈다, 삼밭갈이, 이라는  말이 있어야 마경이(麻耕伊) → 삼받갈이」라는 지명이 존재할 수 있다. 「마경이(麻耕伊)」로 해석한 고구려어는 신라어와 다르지 않다.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 일대 :

고구려 마경이(麻耕伊)  → 삼받갈이(삼밭갈이)

쟁기 사진과

「쟁기 杞(시)」자 금문(金文)

 

 

   49) 광주광역시 일대 : 백제 무진주(武珍州) → 힘돌골(현대어 : 힘도랑골)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일대를 흐르는 황룡강과 명림천이 만든 지형은 「주먹」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이 「주먹 그림」을 관측한 백제인은 「무진주(武珍州) → 힘돌골(현대어 : 힘도랑골)」이라 작명했다. 「굳셀 武(무)」의 백제 훈은 「힘쓸 武(무)」로 보았다. 그 까닭은 필자가 소시적에 한자를 배울 때, 「힘쓸 武(무)」로 배웠기 때문이다. 백제 무진주를 신라 경덕왕은 무주(武州)라고 개칭했다.

 

   ㉠ 武 : 힘쓸(힘쓰다) 무 → 훈차 ; 힘

       珍 : 옥 돌 딘 → 훈음차 ; 돌(현대어 : 도랑)

       武珍州 : 힘돌골(현대어 : 힘도랑골)

 

   ㉡ 武 : 힘쓸(힘쓰다) 무 → 훈차 ; 힘

      武州 : 힘골(현대어 : 힘골)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일대 :

백제 무진주(武珍州) → 힘돌골

주먹 캐릭터와

굳셀 武(무)」자 금문(金文)

 

 

   50)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일대 : 백제 완산주(完山州) : 둥글골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 경계를 흐르는 소양천이 만든 지형은 원(圓)의 1/4호를 만들었다. 이를 관측한 백제인은 「완산주(完山州)」라고 작명하였다. 「완(完)」이라는 한자의 훈에 「ⓛ 완전하다. ② 둥글다.」가 있으나, 사비시대에「ⓛ 完全하다.」라는 한자어가 있을리 없으므로, 「② 둥글다.」를 취하였다. 신라 경덕왕은 전주(全州)로 개칭했는데, 이 시기에는 한자어가 상당히 보급된 것으로 사료 된다. 왜냐하면 全(전)의 훈이 「완전(完全) 전」이기 때문이다.

 

   ㉠ 完 : 둥글 완 → 훈차 ; 둥글

        山 : 뫼 산 → 훈차 ; 뫼

        完山州 : 둥글뫼골 (현대어 : 둥근산골)

 

   ㉡ 全 : 완전(完全) 전

        ∴ 全州 : 완전한 고을 (둥글골) {고대에는 원(圓)을 완전한 형태로 본 것이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일대 :

백제 완산주(完山州) : 둥글골

둥근 원 도형과

둥글 圓」과 「둥글 完」전서(篆書)

 

 

   51) 강원도 춘천시 일대 : 고구려 우수주(牛首州) 일운 우두주(牛頭州) : 쇠마리골

 

    강원도 춘천시 일대에 북한강과 소양강 두 물이 만나서 만든 지형은 「쇠뿔」모양의 지형을 만들었다. 이를 관측한 고구려인은 '쇠뿔'이 「소머리」이 붙어 있으므로, 「우수주(牛首州) 일운 우두주(牛頭州) : 쇠마리골」이라 작명하였다. 삼국은 단 한번도 같은 국가에 속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삼국이 모두 「지형이라는 그림」을 근거로 지명을 작명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하나의 국가를 건설한 때가 있었던 것인데, 그들의 조상 중의 상당수가 고조선 유민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고유한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 한자를 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지명어」는 모두 쉽고, 기본적인 한자로만 이루어 졌다. 기본적인 한자는 고조선 유민에 의해 암기 교육을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이다.

 

    牛 : 소 우 → 훈차 ; 소(쇠)

     首 : 마리 수 → 훈차 ; 마리

     ∴ 牛首州 : 소(쇠)마리골 {현대어 : 소머리골}

 

강원도 춘천시 일대 : 고구려 우수주(牛首州) 일운 우두주(牛頭州) : 쇠마리골

쇠 뿔 사진과

「머리 首(수)」자 금문(金文)

 

 

   52) 강원도 강릉시 일대 : 고구려 하슬라주(何瑟羅州) 일운 하서량(河西良) : 믈슬부리 또는 믈셔곳

 

    강원도 강릉시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경포대이다. 경포대를 빼 놓고 강릉을 논할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도 강릉(江陵) → 물언덕」이라고 부른다. 강릉 경포대 일대를 관측한 고구려인은 「하서량(河西良) : 믈셔곶{현대어 : 물선곶}」이라 작명하였다. 아울러 하슬라(何瑟羅)라고도 불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何(하)」는 「河(하)」의 오기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 까닭은 '강릉(江陵)'과 '물 河'의 대응관계로 보아도, 「何(하)」는 「河(하)」가 옳은 것으로 추론 한다. 고대에는 붓으로 흘려 쓴 관계로, 「물  (수)」를 흘려 쓰면 「사람 (인)」으로 착각을 할 수 있기 마련이다.

 

    河 : 믈 하 → 훈차 ; 믈 {고구려어 水(수)에도 '勿(믈)'이 있음을 덕물현에서 밝힌바 있다.}

         西 : 셔 → 음차 ; 셔(셔다)

         良 : 고들(곧을) 량→ 훈음차 ; 곳

         河西良 : 믈셔곳 또는 믈션곳 {현대어 : 물이 서있는 곳}

 

    ㉡ 河 : 믈 하 → 훈차 ; 믈

         瑟 : 슬 → 음차 ; 슬(스다, 셔다.)

         羅 : 벌 라 → 훈음차 ; 벌 → 부리 {벌과 부리가 음이 비슷하다.}

         ∴ 河瑟羅 : 믈슬부리 또는 믈션부리 {현대어 : 물이 서 있는 벌판}

 

    ㉢ 江 : 믈 江 → 훈차 ; 믈

         陵 : 언덕 릉 → 훈차 ; 언덕

         江陵 : 믈언덕 {강릉은 경포대의 물이 었는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원도 강릉시 일대 : 고구려 하슬라주(何瑟羅州) 일운 하서량(河西良) : 믈슬부리 또는 믈셔(션)곳

경포대 상공에서 동해를 보고 촬영한 항공사진

 

물 河(하)자 갑골문

 

 

   53) 서울특별시 일대 : 고구려 한산주(漢山州) →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고양시 일대에 세계적인 명산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도심에 이처럼 멋지고 높은 산이 없는 것이다. 북한산 비봉에는 진흥왕 순수비가 있고, 고구려는 한산주(漢山州)라는 지명을 여기에서 비롯했다. 우리 언어에 」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경우에 쓰인다. 바로 「一」과 「大」의 경우에 모두 쓰였다.

 

  「하나」는「」에서 비롯되었고, 「글」은 「큰글」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어 「(漢, 閑)」은 「一과  大」로 쓰였는데, 고구려 숫자 삼(三)은 과연 무엇일까?

 

   {참고 : Chapter 1, 10) 고구려 한홀(漢忽) : 忽 참조. 고구려 웅한이(熊伊)는 다음에 해석하겠음.}

 

    漢 : → 음차 ;

    山 : 뫼 산 → 훈차 ; 뫼

    漢山州 : 忽 () {현대어 : 큰산골}

 

    ※ 북한산(북쪽에 있는 큰산)은 AD475년 백제로부터 공취(攻取)한, 가장 크고 멋진 산이다.

 

서울특별시 일대 :

고구려 한산주(漢山州)

우리 고한국어족의 언어 「一」과 「大」의 경우에 모두 사용하였다. 고구려어는 신라어와 큰 차이가 없다. 모두 고한국어족이기 때문이다.

 

 

   54) 황해남도 과일군 서남쪽 황해남도 장연군과 경계 지역 : 고구려 웅한이(熊閑伊) : 곰

 

    고구려 웅한이(곰이)는 본디 황해남도 송화군 땅이었다. 송화군을 둘로 나누어 서쪽 부분을 과일군으로 개칭했다. 과일 나무가 장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 과일군에 고구려 「마경이(麻耕伊)」「판마곶(板麻串)」「굴천(屈遷)」「웅한이(熊閑伊)」라는 이름을 작명케한 지형이 몰려 있다.

 

    고구려 웅한이(곰이)는 풍장산 남쪽을 흐르는 내(川)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해 바다와 어울려서 만든 지형은 「동물 그림」이다. 이 그림을 관측한 고구려인은「웅한이(熊閑伊){현대어 : 곰큰것}」라고 작명하였다. 웅한이에서 「閑(한)」은 「 → 큰」으로 쓰였다. 또한 「(이)」는 「마경이(麻耕伊) → 삼받갈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한홀(漢惚)을 一」자 지형에 사용하였고, 한산주(漢山州)와 웅한이(熊閑伊)에서는 大」자로 사용하였다. 이는  「지형이라는 그림」을 통하여 판독한 결과다. 삼국의 고지명에 대한「대응 관계」는 「지형이라는 그림」과의 「대응 관계」인 것이다. 지명학자들이여 꿈에서 깨어 나시라!

 

   熊 : 곰 웅 → 훈차 ; 곰

   閑 : 한 → 음차 ;

   熊閑伊 : {현대어 : 곰큰것}

 

황해남도 과일군 서남쪽 일대 :

고구려 웅한이(熊閑伊)  곰

이해를 돕기 위해, 황해남도 과일군 서남쪽 일대를 포토샵으로 삭제하기 전의 모습이다.

 

「곰 熊(웅)자 전서(篆書)」

 

 

   55)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 : 신라 웅지현(熊只縣) → 곰이골 {현대어 : 곰골}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는 진해 해군기지로 유명한 곳인데, 안골포 서쪽에 있는 지형이 동물의 머리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그림」을 판독한 신라인은 「웅지현(熊只縣)  곰이골 {현대어 : 곰골}」이라 작명하였다. 진해구는 경주에서 발견한 금석문에 「웅(熊)」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只(지)」는 「이 지」로, 음조율로 사용한 것으로 추론한다. 신라에도 「곰」의 지형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삼국이 모두 「지형이라는 그림」을 보고 작명하였기 때문에,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熊 : 곰 웅 곰

   只 : 이 지  이

    熊只縣  곰(이)골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 :

신라 웅지현(熊只縣)  곰이골 {현대어 : 곰골}

곰 캐릭터와

「곰 熊(웅)」자 갑골문(왼쪽) 및 전서(오른쪽)

 

 

   56) 중국 길림성 집안현 : 고구려 國內城(국납성) → 「나라두루(드르)忽」

 

   중국 길림성 집안현은 두 번째 고구려 수도로, 첫 번째 수도는 환인시 오녀산성을 배후산성으로 하고 남쪽에 위치한 홀본(忽本)인데, 이 곳이 고구려라는 국호를 낳은 「귀忽(현대어 : 귀골)」임을 밝힌바 있다.{Chapter 1. 20) 고구려의 초기 국명은 구려(句麗) 참조}

 

   그런데 고구려는 2대 유리왕 21년(AD2년)에 國內(국납)으로 도읍을 옮겼다. 현재 우리가 발음하는 國內(국내)는 한어(漢語) 중고음 시대의 발음이다.유리왕 21년(AD2년)은 한어(漢語) 상고음 시대로 「內」의 발음이 지금과 달라서, 중국은 「np」으로 발음했고, 한국 한자음은 「nap」으로 발음했다. 고구려가 「nap」으로 발음한 흔적이 옥편에 「內」의 두 가지 음으로 남아 있다. {內 : ⓛ 안 내, ② 들일 납}

 

   國 : 나라 국  훈차 ; 나라

   內 : 들일 납  훈음차 ; 두루(드르)

    {'드리'가 .두루'나 '드르'와 음이 비슷하고, 조선 중기「風納(풍납 바람드르)와 사용법이 같다.}

   國內 : 나라두루(드르)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드르」로 기록되어 있고, 함경도 방언에 「두루」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어를 두루(드르)로 병기하였다. (Chapter 1. 14) 백제 고미현(古彌縣) 참조.)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명학자들이 어처구니 없게도 고구려 國內城을 「나라내」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망발로 고구려가 國內(국납) 지역으로 천도한 AD2년에는「內」를「nap(납)」으로 발음했는데, 그로부터 최소한 200~300년이 지난 후에야 중국으로부터 「nui」라는 음이 들어와「nai(내)」로 발음하기 시작했는데, 중국인들이 한국 지명학자들의 논문을 읽는다면, 배꼽을 쥐게 될 것이다. 고구려 지명어「內」는「두루(드르)」의 훈음차이지. 「'내(川) ' 또는 강원도 방언 '나리'」의 음차가 아니다.

 

    이는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들의 논저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일조를 하는 매국 행위로, 논저를 모두 수정하여야 마땅한 일이다. 고구려는 중고음 시대에 들어와서야 「內」의 음에, 「nai(내)」와「nap(납)」이라는 두가지 한자음이 병존했고, 그 영향으로 현재까지 옥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한어 중고음 시대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

고구려 國內城(국납성)  → 「나라두루(드르)忽」

나라두루(드르) 적석총 무덤군.

고구랴는 적석총을 신성시했던 나라였다.

 

 

   57) 중국 길림성 집안현 산성자산성 : 고구려 위나암성(尉那巖城) → 위따바회城

 

   지명학자들은 고구려 지명어 「나(那)」를 「내(川)」또는 내(川)의 강원도 방언「나리」의 음차로 보고 있다. 그런데, 아래 왼쪽 지형도는 고구려 위나암성(尉那)이다.(붉은 실선 안쪽) 오른쪽은 위나암 정상부에 있는 환도산성 유적지이다. 위나암성(尉那)이란 위나(尉那)에 있는 암성()이란 말이다. 이 험준한 산에, 살골짜기를 졸졸 흐르는 물 외에, 삼국사기에 기록될 정도의 내(川)가 있을리가 없다. 고구려는「나(那)」자에 있는언덕 (부)」를 근거로, 「따 那(나)」로 사용한 것으로 추론한다.

 

   尉 : 위 → 음차 ; 위 {고구려 거홀(車忽) 일운 상홀(上忽)의 대응 관계로 보아, 上은 "위 上"이다.}

   那 : 따 나 → 훈차 ; 따 {「언덕 (부)」에 의거... }

   巖 : 바회 암 → 훈차 ; 바회

   尉那城 : 위따바회城 {현대어 : 윗땅고개城}

 

  '위내바회'로 해석하면, 현대어로 '윗내고개城'인데, 국납성(國內城) 북쪽 성산자산 밑에는, 계곡에서 졸졸 흐르는 계류수외에,「내(川)」라고 불릴 만한 물이 흐르지 않는다. {백제의 경우는 部(부)를 (부)로 기록했다.} 삼국시대 기록은 현대와 다를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참고로 고대에 왕은 남면(南面)하므로, 북쪽이 '위'이고, 남쪽이 '아래'이다. 위나암성은 국납성(國內城) 북쪽에 있다.{북으로 올라 가는 것을 북상(北上)이라 하고, 남으로 내려 가는 것을 남하(南下)라고 한다.}

 

   ※ 고구려는 고대어 '바회(현대어 : 바위)'를 「파의(巴衣)」,「파혜(波兮)」등으로 표기했지만,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있는「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공암(孔巖)」은 「바회 巖(암)」이지만, 「밀파혜(密波兮) → 미르바회」의 경우는 「고개」다. 이는 고개가 대체로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현제명의 '바위고개'라는 동요를 생각하면 된다. 고구려 위나암성도 고개 위를 깎고 다져서 만든 성이므로, 「바회 巖(암)」으로 표기했지만, 실제는 「고개」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산성자산성 :

위나암성(尉那) → 위따바회城 (윗땅고개城)

위나암성 정상부에 있는 궁궐터 유적지

물이 부족했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을까?

 

위 上」자 금문(金文)

 

 

   58)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 신라 문화군(蚊化郡) → 모긔떼골. 일운 모화(毛火) → 모긔벌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관문성은, 왜구로부터 경주를 방어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 관문성이 속한 군(郡)을 문화군(蚊化郡) → 모긔떼골」이라 불렀고, 일운 「모화(毛火) → 모긔벌」라고도 칭했던 곳이다. 예나 제나 모기는 성가신 곤충이다. 특히 해안 모기는 물리면 통증이 심하다. 지형. 지물 대신에 '모기'라는 곤충도 작명의 기제로 사용하였다.

 

   蚊 : 모긔 문 → 훈차 ; 모긔

        化 : 될(되다) 화 → 훈음차 ; 되 → 떼 {'되'와 '떼'가 음이 비슷하다.}

       蚊化郡  : 모긔떼골

 

   ㉡ 毛 : 모 → 음차 ; 모(긔) {'모긔'에서 '긔'가 생략된 형태이다.}

       火 : 불 화 → 훈음차 ;

       ∴ 毛火) → 모(긔) {현대어 : 모기벌}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

신라 문화군(蚊化郡) → 모긔떼골.

일운 모화(毛火) → 모긔벌

모기 캐릭터 및

「모긔 蚊」자 전서

 

 

   59)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일대 : 진한 소국 압량국(押梁國) → 누르돌나라

   60)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일대 : 신라 노사화현(奴斯火縣) → 죵것발골

 

   금호강과 남천 및 오목천이 만나서 만든 지형이 대단히 흥미를 더한다. 손과 발을 옆에서 바라본 형상이 위성 지도위에 그려 있다. 옛 압량군에 속했던 「손 모양의 그림」은 남천을 누르고 있고, 옛 자인현에 속했던, 압량면 금구리는 오목천을 맨발로 밟고 있다. 이 「손 모양의 그림」은 진한 소국 압량국(押梁國) → 누르돌나라」라는 국호를 작명케 하였고, 「맨발 모양의 그림」은 신라의「노사화현(奴斯火縣) → 죵것발골」이라는 옛 지명을 낳았다. 신라 경덕왕은 압량군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했고, 노사화현은 자인현으로 개칭했다.

 

   ㉠ 押 : 누를(누르다) 압 → 훈차 : 누르

        梁 : 돌 량 → 훈음차 ; 돌

        ∴ 押梁國 : 누르돌나라 {현대어 : (손이) 도랑을 누르는 나라}

 

   ㉡ 獐 : 장 → 훈음차 ; → 누르 {노루라는 동물은 털색깔이 누르스름해서 붙은 이름이다.}

        山 : 뫼 산 → 훈차 : 뫼

        ∴ 獐山郡 : 뫼골 {실제는 누르는뫼골 이다.}

 

   ※ 지명학자들은 이 지형을 본 일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 獐(장)」과「누를 (압)」을 대응시켜 押梁(압량)을 가을에 오곡이 익어가는,「누런 들」로 해석했다. 이렇게 대응 시킨 것은 나무랄 데가 없는 모범 답안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래 왼쪽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지형이라는 그림」은  「도랑을 누르고」있다. 진한 소국 압량국(押梁國)은 손이 도랑을 누르고 있는 「지형」을 보고 국호를 작명한 것이다.  押(압)과 獐(장)의 대응 관계는  「누르다(押)」: 「누르다(獐)」의 관계인 것은 틀림 없다. 다만 차이점은 「지도를 보았느냐?」「지도를 보지 못하였느냐?」의 차이점이 있다.

 

   ㉢ 奴 : 죵 노 → 훈차 ; 죵

        斯 : 이 것 사 → 훈차 ; 것

        火 : 불 화 → 불 훈음차 ; 발 ('불'과 '발'이 음이 비슷하다.)

        奴斯火縣 : 죵것발골 {맨발의 지형을 보고, 신라인은 '죵것발'이라 칭했다.}

   

  ※ 지명 학자들 이야기를 더 해야 한다. 지명어 「奴(노)」는 「내(川)」나「강원도 방언 '나리'」의 음차로 보고 있다. 斯(사)는 해석이 안되니까 묵살하고, 대충 「내(川)가 있는 벌판」쯤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현실이다. 제대로 해석을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해석의 잣대가 없기 때문」인데, 흥미롭게도 삼국인들은 모두 「지형이라는 그림」을 잣대로 제시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필자와 지명 학자와의 차이점은 「지도를 보았느냐?」「지도를 보지 못하였느냐?」의 차이점에 있다. 그들은 선조들이 후손에게 남겨준 지혜를 알지 못하고, 삼국의 언어를 망치고 있다.「지형이라는 그림」과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한 초기 지명의 대응 관계」야 말로 진정한 대응 관계인 것이다. 「지형이라는 그림」속에 삼국의 언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꿈속을 헤매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일대 : 진한 소국 압량국(押梁國) → 누르돌나라

압량면 부적2리 상공에서 촬영한 금구리 일대 항공 사진 → 발 뒷금치와 발바닥이 보인다.

 

 

  61)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일대 : 고구려 어을매곶(於乙買串) →「얼매곶」

  62) 백제 관미성(關彌城) → 관문두루(드르). 광개토왕릉비문 : 각미성(閣彌城) → 누각두루(드르)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북서쪽에 오두산성과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이 있다. 이 곳은 임진강물과 한강물이 만나 섞이는 곳이다. 이 통일전망대와 오두산성이 있는 이 지역은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불룩 튀어나온 곶(串)이다. 이 곶 앞에 임진강물과 한강물이 서로 「어는 것」을 관찰한 고구려인은 「어을매곶(於乙買串) →「얼매곶」이라 작명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지명 학자들이 임진강물과 한강물이 서로 섞이는 이곳에, 「곶(串)」이 있다는 사실을 현재까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한 지명 학자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치는 곳이라 사람 입처럼 튀어 나와 일본어 口{くち(구찌)}와 비교하고 있다. {천장구현(泉井口縣) 샘우믈곶}의 口(구)는 일본어 {くち(구찌)}와 관련된 것 보다는, 곶(串)과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사용한 「곶(串)」의 음차일 뿐이다.

 

                                                (연음)

   於乙 : 어을 → 음차 ; 어을 ----------→ 얼(얼다.)

       買 : 매 → 음차 ; 매 {신라어 : 믈, 현대어 : 물}

       믈(가람)於乙買串 : 얼매곶

       ※ 고구려어에 「얼다」라는 말이 있으므로, 「얼운 長(장)」도 있어야 한다.

 

   ㉡ 交 : 섯길 교  → 훈차 ; 섯기는

       河 : 믈(가람) 하 → 훈차 ; 믈(가람)

       ※ 交河 : 섯기는 믈(가람) {얼다 = 섯기다}

 

   ㉢ 關 : 관 → 훈차 ; 관문(關門)

       彌 : 두루 미 → 훈음차 ; 두루(드르) {Chapter 1. 14) 고미현(古彌縣) → 고두루(드르) 참조}

       關彌城 : 관문두루(드르)城

          {관미성에는 문루(門樓)가 있어야 하고, 가까운 곳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야 한다.}

 

   ㉣ 閣 : 누각 각 → 훈차 ; 누각(樓閣)

       彌 : 두루 미 → 훈음차 ; 두루(드르)

       ※ 閣彌城 : 누각두루(드르)城  

          {각미성에는 문루(門樓)가 있어야 하고, 가까운 곳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야 한다.}

 

       ※ 언어학적으로 볼 때, 백제 퇴뫼식 성곽이 발견된 오두산성 일대가 가장 적합한 곳이다. 성곽이 있다는 것은 문루(門樓)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인근에 교하읍이라는 비교적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일대 :

고구려 어을매곶(於乙買串)  →「얼매곶」

.백제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되는 오두산성 일대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각미성(閣彌城)

오두산성 일대의 백제 퇴뫼식 성곽

백제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

얼매곶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강

교하(交河)란 두 물이 섞인다는 뜻이다.

 

   ※ 지명 학자들 논저의 저변에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는 상당히 달랐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까닭을 살펴 보면,        

 

    ㉠ 고구려 본지명과 일운 지명을 일치시키려고 하는데 기인한다. 본지명과 일운 지명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데, 수학적 등식 관계처럼 일치시키려는 것이 문제점이다.

 

    ㉡ 고구려 지명을 음차 일변도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훈차나 훈음차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전술했다시피「해석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음차 일변도로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고구려어라고 주장하는 말이 신라어와 전혀 다른 것이다. 지명학은 검증이 불가능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벌리는 일이다. 삼국시대 지명학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과학이다.

 

    ㉢ 지명 학자들은 「지도」를 면밀히 검토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형」에 관심 조차 없다. 그런 까닭에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일대 마이산을 보고, 「큰들」이나「큰돌(큰도랑)」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지명 학자들은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모두다 「정설」이라 한다.

 

 

Copyright ⓒ pasteltone.com